【시와 글】/바둑이야기

'꿈꾸는초보'는 어떻게 프로가 되었나 (글. 프로기사 조혜연)

이제민 시인 2020. 1. 28. 19:18

'꿈꾸는초보'는 어떻게 프로가 되었나


2014년 프로기사 조혜연 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기량(바둑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바둑교실에서는 적합한 상대를 찾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소녀는 모뎀을 통해 바둑서비스에 접속하였고, 당시 가장 많이 이용했던 서비스가 천리안이었다. 천리안 바둑의 일일 이용자는 수천 명이 넘었는데, 다들 엄청난 전화비를 부담하며 대국사이트에 접속했다. '꿈꾸는초보'라는 대화명을 가진 소녀가 바둑 실력을 쌓자 천리안에서의 인지도가 순식간에 높아졌고, 소녀의 대국실은 항상 접속자 수가 꽉 차 있었다. 매일 같이 혹독한 단련을 받으며 소녀는 급성장하였고, 마침내 초등학교 6학년, 사상 최연소 3위 기록을 세우며(최연소 입단 1위 조훈현, 2위 이창호) 프로 입단에 성공하게 된다.

2014년 06월 23일 10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8월 23일 14시 12분 KST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게재된 프로기사 조혜연 글
*출처: https://m.huffingtonpost.kr/hyeyeon-cho-760/story_b_5520445.html


급변하는 뉴미디어 환경과 바둑은 어떤 상호작용을 해왔는가.

필자가 입단대회를 통과하여 프로기사(바둑기사)가 된 후 무려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찌 보면 숙명과도 같았던 바둑과의 만남과 인연이, 아직도 낯선 화두로 필자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헝클어놓고 있다. 뉴미디어 시대의 바둑을 조명함에 앞서 필자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뉴미디어와 바둑의 만남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겠다.

소녀는 7세 때 바둑에 입문하여 고사리손으로 바둑알을 만졌다. 그때는 디지털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대중은 LP판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고, 바둑팬들은 인터넷 바둑이란 단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시중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기원이란 일반적으로 매캐한 담배연기에 절은, 음산하고 혼탁한 분위기에 자장면 그릇이 쌓여 있고 화장실 냄새가 짙게 밴, 내기바둑이 주로 두어지는 장소였다.

(참고자료 : 한국바둑의 성장과 쇠퇴)

소녀는 집근처의 바둑교실에 다녔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바둑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데,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수원 남문의 한 기원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녀는 거기서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와 대좌하게 됐는데, 그저 바둑이 재미있어서 상대의 위용에 위축되지 않고 한 수 한 수 두어나갔다. 결과는 소녀의 패배. 대국 직후 소녀는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는데, 그것은 기원의 담배 냄새가 워낙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부모님 역시 일반 기원은 강한 상대들이 있긴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바둑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소녀는 프로기사를 목표로 하는 또래의 유망주들과 어울리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소녀의 바둑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찾아왔다. 뉴미디어의 시발점이 되는 디지털 기술과 우연히 맞닥뜨린 것이다. 그것은 하이텔 단말기였는데, 꿀단지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조그마한 상자 크기였다. 그 하이텔 단말기로 바둑을 둘 수 있었는데, 이른바 '하이텔 바둑동'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하이텔 바둑동을 노래한 시)

(머니투데이 관련 기사)

소녀는 단말기를 가지고 놀다가 하이텔 바둑을 알게 되었다. 하이텔 단말기는 소위 '386' 혹은 모뎀 컴퓨터가 들어오기 이전에 유행하던 것인데, 소녀의 눈에는 경이롭기 짝이 없는 별세계 같은 공간이었다. 소녀는 하이텔 단말기로 바둑을 많이 두었는데, 컬러는커녕 마우스도 없는 시대였기에 흑백 바둑판에 좌표로, A-16 이런 식으로 키보드에 입력해야 나의 착수(돌을 놓는 것)가 화면에 뜨게 된다.

(참고자료: 바둑의 좌표 우주의 시초부터 / 글: 문용직 박사 출처: 사이버오로 오로산책)

소녀는 하이텔 단말기에서 비쳐지는 흑백 바둑판이 마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원하는 만큼 대국을 하고 싶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조그마한 단말기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인 소녀는 이미 시력이 나빠져서 두꺼운 안경을 써야 했다. 급격히 저하된 소녀의 시력을 걱정한 부모님은 하이텔 대국을 엄히 금지하였고, 소녀는 부모님이 출타 중인 틈을 타서 몰래 하이텔 바둑을 두곤 했다. 당시 하이텔 단말기로는 하이텔바둑만 이용 가능했지만, 곧이어 도입된 모뎀을 통해서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바둑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모뎀 및 인텔 386의 등장으로 하이텔 단말기는 추억 속 빛바랜 추억으로 남게 된다.

(참고자료 : 추억의 하이텔 단말기, 국내 PC 통신의 본격화를 꾀했던 한국통신의 노력)

모뎀이 보급되자 대중은 전화선을 연결하여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소녀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기량(바둑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바둑교실에서는 적합한 상대를 찾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소녀는 모뎀을 통해 바둑서비스에 접속하였고, 당시 가장 많이 이용했던 서비스가 천리안이었다. 당시에도 컬러 컴퓨터는 보급되지 않은 상태여서 퍼런 화면에 퍼런 바둑판과 바둑알이 화면에 떴다. 천리안 바둑의 일일 이용자는 수천 명이 넘었는데, 다들 엄청난 전화비를 부담하며 대국사이트에 접속했다. '꿈꾸는초보'라는 대화명을 가진 소녀가 바둑 실력을 쌓자 천리안에서의 인지도가 순식간에 높아졌고, 소녀의 대국실은 항상 접속자 수가 꽉 차 있었다. (당시 천리안 대국실은 방 1개당 최대 12명만이 입장 가능했다. 대국자는 두 사람이므로 관전객은 10명 이하로 제한됐다.)

소녀는 '천리안의 마스코트'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이는 소녀와 대국하기 위해 전국의 고수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객(바둑팬)은 '꿈꾸는초보'가 지방의 고수들과 대국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이는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많은 바둑팬이 선명히 기억하고 계신 사실이기도 하다. 천리안바둑이 당시의 경쟁사인 하이텔바둑 및 나우누리바둑에 앞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했던 이유 중 하나는, '꿈꾸는초보'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소녀가 상대해야 했던 전국의 바둑 고수들을 보는 재미로 바둑팬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컴퓨터가 아니었으면 무슨 수로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고수들을 소녀가 만날 수 있었겠는가. 매일 같이 혹독한 단련을 받으며 소녀는 급성장하였고, 마침내 초등학교 6학년, 사상 최연소 3위 기록을 세우며(최연소 입단 1위 조훈현, 2위 이창호) 프로 입단에 성공하게 된다.

바둑은 디지털 기술발달의 영향으로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바둑팬의 안방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바둑은 급속도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사실 뉴미디어의 등장에 바둑만큼 빠르게 반응한 분야도 많지 않다. 바둑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번갯불에 콩 볶듯 맹렬한 속도로 온라인 세계로 옮아갔고, 지금도 온라인 대국이 일차적으로 벌어지며 오프라인 대국은 정기 모임 등에서 간간히 구경할 수 있는 정도이다.

다시 소녀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겨보면, 소녀가 프로 입단에 성공한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모뎀 컴퓨터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의하여 초고속 인터넷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천리안은 바둑 서비스를 정액제로 제공하다가 종량제로 바꾸면서 큰 반발을 샀다.

(참고자료 : MS, 초고속 인터넷 제공 [중앙일보] 2002.02.23)

(참고자료 : 인터넷 종량제와 한국통신의 참모습, 작성자 제리)

이후 천리안바둑은 사양길을 걷게 되고, 소녀는 판다넷(Pandanet) 등 외국 사이트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한국에서는 오로바둑(현 사이버오로)이 개발되었고, 소녀가 중학생이 되던 시점 인터넷을 통하여 그림판 포토샵 등이 소개되고 있었다.

프로기사가 된 이후 소녀의 삶은 통제되지 않은 채 날뛰는 망아지 같았다. 소녀는 어릴 적 인터넷바둑에 심취하던 시절을 잊고 만화를 보며(주로 고스트바둑왕, 히카루의 바둑)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만화카페를 개설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다음카페에서 보냈다. 이때 국민게임으로 등극한 스타크래프트의 열풍으로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소녀는 PC방에서 포트리스2를 하거나 다음카페에 접속하여 2만 명의 카페 회원과 함께 채팅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 바둑을 두는 대신 프리챌로 채팅하고, 매주 화요일 서점에 비치되는 아이큐 점프를 사 모으며 만화에 심취했던 소녀는 바둑 실력이 거의 늘지 않아 정체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에서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이 한국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소녀의 바둑 인생은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친다.

소녀가 바둑에 집중하지 못하고 IT를 통해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바둑은 뉴미디어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진통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우선 7,80년대의 바둑팬은 프로기사들의 치열한 승부혼이 담긴 기보를 일간신문을 통해 받아보고 있었다. 일간지는 하루에 10수 이내로 기사들의 기보를 실었고 거기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고령의 바둑팬들이 신문의 바둑란을 오려내어 하나의 소책자로 갖고 다니면서 기보를 탐독하는 모습은 당시에는 흔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뉴미디어는 바둑의 패러다임을 180도로 바꿔놓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 바둑 사이트는,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생중계로 바둑팬의 안방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기보란 대국을 기록한 바둑의 텍스트(text)인데, 아무래도 생중계로 기보를 감상하며 두 대국자의 심리를 따라가며 분석하는 것과 이미 승패가 결정된 기보를 받아보는 것은 관전의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간지의 바둑란은 인터넷 사이트의 생중계에 밀려 인기를 잃었고, 이에 더하여 많은 일간지가 바둑의 지면을 축소하거나 아예 없애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도 메이저 신문사(조중동)를 제외한 많은 일간지가 바둑을 다루지 않고 있는데, 바둑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는 상황 하에 바둑지면을 유지하길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폭풍 같은 십대를 거쳐 이십대에 진입한 소녀에게, 세상은 참으로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디지털 기술발달의 크고 작은 격변을 직간접으로 체험한 소녀는, IT의 발달 과정을 눈으로 좇으며 때로는 인터넷 바둑도 두고, 포토샵도 다뤄보고 동영상을 인코딩하여 다음카페에 올리는 기술도 독학으로 익혔다. 곧이어 맞이한 20대. 바둑공부에 전념하지 못한 채 어찌 보면 허송세월한 십대 중후반을 돌이켜보며, 소녀는 문득 정신을 차린다. 2년 후 대학에 진학했고, 학업과 바둑을 병행하였다. 대학 재학 중 스티브 잡스라는 세기의 천재가 온 세상을 스마트폰 광풍으로 물들였다. 사이버오로는 오로바둑 앱을 출시하였고, 바둑팬들은 휴대폰을 통해 '세기의 십번기' 등 주요 프로대국을 생중계로 관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바둑 TV 는 화려한 해설진을 기용하여 국내외 주요대국을 Live로 방영하고 있고, 일간지에서 바둑란이 갖는 매력은 뉴미디어의 발전과 반비례하며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필자는 언론홍보대학원(건국대)에 재학하면서, 뉴미디어와 바둑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분석해보고자 했다. 이는 급변하는 환경에 바둑이 잘 적응하고,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바둑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무궁무진한 이 세계의 매력에 눈을 뜨길 바랐기 때문이다. 보통 환경적 변화는 충격을 몰고 오게 되는데, 바둑은 비교적 충격을 덜 받고 성공적으로 뉴미디어 환경에 적응한 케이스다. 물론 올드미디어에게는 점차 외면당하고 있고, 일례로 KBS 등 지상파 방송에서 바둑뉴스가 자취를 감춘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다. 이는 바둑을 사랑했던 애기가 층이 고령화된 것, 그리고 세대의 단절과 무관하지 않다. 뉴미디어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바둑을 외면한다면, 바둑은 앞으로도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 양쪽에서 배척당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필자는 프로기사로서, 한 명의 바둑 종사자로서, 한때 일천만을 헤아렸던 바둑팬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일차적으로 수입 급감과 생존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사로서 긍지를 갖고 바둑을 두는 일이나 바둑을 가르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함의를 갖지 못하게 되는 일. 이는 급변하는 뉴미디어 환경에서 바둑이 환경적, 사회적, 그리고 시대적 요구를 읽어내고 응답하며 정확한 자기규정을 해야 하는 상황임을 의미한다. 바둑은, 그리고 바둑계 종사자는 신속히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에 봉착한 바둑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대중에게 설득하는 작업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바둑은 혁신적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기술발달에 적응하며 자신의 길을 찾고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통하여 바둑과 뉴미디어의 만남을 연대기별로 정리해보고자 했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였을 중고등학생 시절 바둑의 끈을 놓친 것이 후회로 남는다. 당시 바둑이 인터넷과 어떤 교감을 했는지 기억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필자의 현 관심사로 시선을 옮겨보고자 한다. 바둑은 문화콘텐츠로 재정의 혹은 재해석 되어야 하고, 바둑의 기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로 새롭게 대중에게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현재 생각이다. 바둑이 현재 서 있는 지점 -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 간의 관계에서 내재한 긴장감 속에서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바둑이, 사회적으로 한걸음 도약하는 하나의 문화 브랜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출처: https://m.huffingtonpost.kr/hyeyeon-cho-760/story_b_5520445.html
*출처: http://cyberoro.game.picaon.com/board/oro_view.oro?bd_num=14166

 

 

(하이텔 바둑동을 노래한 시)

 

 

하이텔 바둑동 엠티

이제민

바둑동으로 인연이 되어
대국도 하고
대화도 나누지만
마음 한편엔
그리움 쌓여만 가고

너의 모습
너의 목소리
궁금증을 간직한 채
참석한 바둑동 엠티

실제 모습은
기대와는 다르지만
느낌만은
오랜 기우(棋友)처럼
다정하게 다가온다

마음속에 간직한
기나긴 날들을 다 풀어헤치려니
하룻밤이 너무 짧기만 하구나.

* 2000년 6월. 하이텔 바둑동 무주 엠티를 다녀와서

*[모임후기] 하이텔 바둑동 무주 엠티: http://cafe.daum.net/love2poem/3RU1/8
*바둑시 모음 7 (ㅍ,ㅎ,기타)> 패싸움 외7편: http://cafe.daum.net/love2poem/M42j/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