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좋은 시와 글

웃지 않는 사람은 우리 둘뿐

이제민 시인 2006. 10. 4. 11:06

<그 남자>

그녀와 나는
아직 이름도 서로 모르지만
거의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이!
그러니까 서로 얼굴만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죠.

보통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창 밖을 내다보곤 하지만,
오늘은 많이 피곤한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어버립니다.
 
졸고 있는 그녀의 고갯짓은 거의 예술입니다.
오른쪽으로 끄덕끄덕, 왼쪽으로 끄덕끄덕
그러다 가끔 휙~하고 목운동을 한 바퀴 하기도 하고,
 
그녀의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저러다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죠.
 
그런데..이러언~~
차라리 창문에 머리 부딪혀서
잠을 깨는 편이 나을 뻔했나 봅니다.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순간.
그녀는... 제가 붙잡을 사이도 없이
저~앞으로, 한바퀴를 굴러가더라구요.
 
사람들은 다득 웃고 난리가 났죠.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운 나.
웃지 않는 사람은 우리 둘뿐입니다.
 
아, 마음 아파...
얼마나 창피할까요?


<그 여자>

'아..머리 감기 진짜 귀찮다.
그냥 모자 쓰고 나갈까?'
 
하지만 결국은 머리를 감았어요.
오늘도 버스에서
내 뒷자리에 앉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럼요! 아무리 귀찮아도..
머리, 감아야죠..
 
비몽사몽 젖은 머리로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그 사람.
 
내가 이틀에 한번 감던 머리를
이젠 아침마다 감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일 음악도 안 나오는 이어폰을 꽂고
그 사람 콧노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오늘도 그냥 그렇게
말없이 내 뒷자리에 앉아만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감겨지는 내 눈꺼풀..
졸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하지만 결국,
정말 안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끽~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는데...
나는 왜 버스 바닥에 앉아 있을까요?
 
꿈처럼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차라리 괜찮아요, 하지만
웃지도 않는 그 사람의 표정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거죠?
불쌍하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표정?
 
...난 왜 이럴 때, 기절도 안 하나요?
 


출처 : " 그 남자 그 여자 "
이미나 지음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아름다운 101가지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