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수필, 글

나의 바둑이야기 1

이제민 시인 2006. 6. 25. 15:41

나의 바둑이야기 1

 

글. 이제민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3학년 때니까 한 10살쯤 됐을 것이다. 방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오셨는지 거실에서는 떠드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살짝 방문을 열고 보니 아빠 친구 분들이었다. 그들은 만났다 하면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곤 했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얘기도 별로 안 나누고 교대로 바둑알을 바둑판에 놓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 재만 남을 때까지 그대로 손가락에 끼워놓고 두 눈을 부릅뜨고 반상을 쳐다보는 거 하며, 시종일관 부채를 부치면서 양반처럼 '에헴'하는 표정이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아빠 친구 분이 오시면 또 바둑을 두러 오셨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매번 시중을 드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셨다. 한 번 시작되면 밤늦은 시간까지 꼼짝 않고 바둑에 열성이었다. 가끔은 밤을 꼬박 세울 때도 있었다. 나는 일찍 자서 그날은 몰랐는데 그 다음날 보면 바둑판이 그대로 있고 술상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자주 짜증을 내셨다. 그 후론 내가 아빠의 심부름을 내가 도맡았다. 오빠는 장남이라고 심부름을 잘 시키지 않았다. 심부름은 주로 술과 담배였다. 나는 슈퍼에서 사 가지고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바둑두는 것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아빠는 따먹은 돌을 나에게 주면서 가지고 놀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방에 들어가 네 할 일 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아빠는 나에게 여기서 놀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심부름을 시키기가 또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바둑에 호기심이 있어서 매번 옆에서 구경을 하곤 했다. 돌을 하나하나 놓으면서 자기 집을 짓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아빠한테 조르기도 했다.

 

"아빠, 나도 바둑 두고 싶어."

 

그러면 아빠는 "우리 공주님께서 바둑을 두고 싶다고…… 좀더 크면 배워요."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아빠 친구 분이 오셔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물론 나도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아빠 몰래 바둑판을 꺼내어 어제 아빠랑 친구 분이 둔 바둑을 흑백(黑白)을 교대로 둬 나아갔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알고 나니 복기(復碁)라는 것인걸 후에나 알았다.
한 50수정도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와!'하고 놀라는 소리를 들었다. 옆을 쳐다보니 바로 아빠인 것이다. 아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표정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아빠한테 혼날까 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빠는 6치 되는 바둑판을 보자기로 싸서 언제나 안방에 고이 놓아두었다. 그러나 그날은 새벽까지 바둑을 두어서 미쳐 치우지 못했다. 그런 것을 내가 만졌으니 아빠한테 혼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잘못을 빌었다.


"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만질게요."

 

아빠는 잠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아빠의 그런 표정을 처음 봐서 그런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내 옆에 다가와 앉으면서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혜영아, 너 바둑 재미있니?"
"네, 아빠."
"아빠가 바둑 가르쳐 줄까?"
"정말요? 아빠."

 

나는 아빠에게 혼날 줄 알다가 칭찬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나 좋아서 아빠 얼굴에 뽀뽀를 했다. 아빠도 기분이 좋은지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아빠랑 바둑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둑을 두지 않고 아빠한테 강의를 들었다. 아빠한테 바둑용어도 배우고, 사활(死活)도 배우고 또 포석(布石)도 배웠다. 사활이라 봤자 어려운 것이 아니고 궁도가 3개이면 치중하면 죽는다, 6사8생 등 기초적이었는데도 이해도 안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혼자 배운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복습을 했다. 학교 숙제는 대충 끝내도 바둑만큼은 열심히 노력했다. 아빠도 그런 내가 신통한지 친구 분들과 바둑두는 것보다도 나와 같이 두는 것을 더 좋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빠는 바둑에 대한 꿈을 나로 통해 이루려는 것이었다.
아빠와 나의 그런 열성 덕분에 배운지 3개월만에 아빠한테 9점에 도전을 할 정도로 내 실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물론 게임은 안 되지만 아빠가 내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많이 봐주곤 했다. 물론 내가 눈치를 못 채게 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어김없이 바둑 생각이 떠올랐다.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에는 온통 미로 속을 헤매는 공주처럼 낮에 둔 대국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잠들고 했다.
아빠는 그 당시 아마5단으로 기원에서 강1급을 놓고 행세를 했다. 그래서 아빠 친구 분들은 하나같이 고수들뿐이었다.
아빠 친구 분들도 나를 보면 '많이 늘었네. 조그만 게 제법이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가끔씩 지도도 해 주셨다.
처음에는 아빠하고만 대국을 하다가 다른 사람과 대국을 하니 바둑이 이상했다. 처음부터 바둑이 내 생각대로 안되고 어디다 둬야 할지 머뭇거리게만 되었다. 아빠하고 둘 때는 매번 둬서 '내가 여기 두면 아빠는 저기다 두겠지' 하는 식으로 느낌이 왔는데 전혀 감이 안 왔다. 그날 난 9점 놓고 처음으로 무자비하게 쓴맛을 봤다. 살은 돌이 겨우 두 집씩 몇 개만 살았을 뿐 거의 다 죽었다. 그 아저씨가 미웠다. 미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 마라, 혜영아. 바둑은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거야. 지고 이기는 것보다는 왜 졌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거지."


아저씨는 내 돌을 잡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죽인 것인데 그런 나를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좋은 말씀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메모해서 제일 잘 보이는데다가 적어 놓고 가슴에 새겨 놓았다. 「지고 이기는 것보단 내용이!」라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