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수필, 글

나의 바둑이야기 4

이제민 시인 2007. 1. 14. 19:50

나의 바둑이야기 4

 

글. 이제민

 


지영씨와의 만남은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아하던 바둑이 멀어지게 되었다. 꼭 바둑이 싫어서라기보다도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선뜻 둘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역전(驛前) 같은 길거리에서 바둑두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쯧쯧, 한심하군. 요즘 바쁜 세상에 바둑을 두다니." 하고는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그때는 별로 크게 생각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지영씨와 많이 놀러다녔다. 그해 가을엔 내장산을 갔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 그와 회포를 풀려고 만났었다. 그날은 그와 만난다는 생각에 시험이 끝나자마자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도 벌써 와 있었다. 그가 나를 보자 먼저 얘기를 꺼냈다.

"혜영아, 어서 와. 시험은 잘 봤니?"
"네. 그냥 봤어요."

그는 내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는지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얘기도 해 주었다. 그러다 그는 내 귀가 솔깃한 말을 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 어디 가서 근사하게 보내자. 음. 어디 갈까? 혜영이는 영화도 좋아하니까 먼저 영화나 볼까?"
"네. 좋아요. 저도 영화 본 지 오래되었어요. 안 그래도 영화를 보고 싶어했는데……."

극장에 도착하자 바로 상영이 시작되었다. 극장 안에는 시험이 끝나서인지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자리를 잡고 난 후 지영씨는 잠시 휴게실에서 오징어와 팝콘을 사 왔다. 그리고는 팝콘을 나에게 주고 오징어는 질근질근 뜯어서 주었다. 영화는 점점 흥미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모두들 영화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영화의 내용은 이랬다.
젊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 그 남자는 크면서 고아가 되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사귄 한 여자가 그 남자를 위해 험한 일도 하고 해서 학비를 벌어 마침내 출세를 시켰다.
그런데 그 남자는 좋은 직장을 들어가더니 거기서 만난 아가씨와 사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찾아가서 몇 번 사정을 했다. 앞으로는 만나지 말라고……. 그러나 그 남자는 옛정은 생각지 않고 옛 애인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 여자는 복수는커녕 그 남자를 위해서 계속 아낌없는 노력을 했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이 돌아오리라고 믿고서…….
드디어 그러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새로 사귄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끝내 더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너무나 비참하고 슬픈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참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여주인공이 너무 슬프죠?"
"슬프긴 한데 영화는 원래 그렇게 돼야 재미있는 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순간 나는 남자들은 감정이 저렇게 무딜까? 이런 영화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요즘에는 저런 여성이 있을까? 나 같으면 도저히 못 참는데요."

하고는 나는 너무 무뚝뚝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저는 너무 슬퍼요. 꼭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사랑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도 않는다는 것이……."

말끝을 흐리며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려고 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혜영아? 우리 언제 산이나 가볼까? 요새 단풍도 멋있게 물들어 있는데…… 어때?"
"산에요? 음, 산이라……."
"왜? 가기 싫으니?"
"아네요, 가요. 가본지도 오래되었어요. 근데 어느 산이 좋을까요?"
"단풍 하면 내장산 아니니. 거기로 가지."
"네, 좋아요. 언제 갈까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안 되는데 내일 갈까?"

그렇게 해서 그 사람과 내장산을 가게 되었다. 그와 내장산에서 너무나 멋진 하루를 보냈다. 그전에는 그에게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장산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온 산을 물들어 놓고 있었다. 도시를 떠나 이렇게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것을 미처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전에도 자주 오고 할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와 내장산 진입로를 걸어나갔다. 여기도 사람의 인파로 북적거렸다. 모두들 단풍에 물들여 있는 사람들 같았다. 잠시 벤치에 앉아 책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와서 단풍잎을 주우며 내 책 속에 끼워 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혜영아? 사랑해!"

너무 뜻밖의 소리를 들은 나는 뭐라고 말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사실은 그를 좋아하고는 있지만 여기서 그런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심장 박동이 빨라져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에게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있는 나를 보면서 자기가 말한 내용이 이상했는지 다시 덧붙여 말했다.

"난 처음 만날 때부터 혜영이를 좋아하고 있었어. 혜영이도 나를 좋아하고 있지?"

나는 마음속으로 '네'하고 대답했다. 잘못 하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날은 그에게 그런 말을 처음으로 들어서 그런지 그 후로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도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시 한 수를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시를 떠올리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갔다.


< 창문 너머 그대와 첫 사랑이 >


그대 창밖을 봐요
하나 둘 떨어지는 나뭇잎
옛 추억이 생각나요.


처음 만났던 그날
우린 낙엽을 밟으며
오솔길을 걷고 있었죠.

바람에 날리어
떠는 나뭇잎을 보며
그에게로 향한 촛불 같은 설레임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었죠.

단풍잎이 하나 둘 쌓여
아름다운 색깔로
온 대지를 수놓을 때
서로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죠.

노란 은행잎을 주워
책 속에 끼워 주던 그대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랑한다'라는 그 말에
가을 햇살에 물든 단풍잎처럼
열린
나의 소박한 마음

오늘도
그대를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요.
창밖을 내다보면서…….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