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수필, 글

나의 바둑이야기 5

이제민 시인 2007. 4. 4. 22:44

나의 바둑이야기 5

 

글. 이제민 


지영씨와 내장산을 갔다 온 이래로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우린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났다. 바둑은 동아리에서 행사하는 것만 참가하고 전혀 두지 않았다. 괜히 그에게 알려질까 봐 두렵기도 하였다. 동아리 친구들이 요즘 자주 안 들르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직 지영씨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우리 과인 영미라는 친구뿐이다.
영미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때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는데 같이 영문과로 입학하게 된 이래로 더욱 친해졌다. 그래서 지영씨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바둑 동아리 사람 만나도 절대로 지영씨에 대해선 얘기하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동아리 사람들은 지영씨와의 관계를 알 수 없었다.
바둑은 한 급이 올랐을 뿐 등한시하니 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다른 얘들은 열심히 해서 두세 급이 오른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토록 열성이었던 지영씨와도 3학년 여름에 헤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영씨 친구인 우리 과 인호 선배와 그 애인과 같이 네 명이 함께 화양구곡에 갔었다.
요번 여름방학 때 놀려 안가면 앞으로는 갈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지영씨가 제안했다. 지영씨가 단둘이 가자는 것을 나는 거절했다. 왠지 마음이 선뜻 내키지가 않아서였다. 그래서 네 명이 함께 가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여자 친구하고 사나흘 동안 놀러 간다고 속이면서 부픈 가슴을 안고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다. 청주를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들어서자 나는 자주 다녀 본 고속도로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내 마음은 무척 설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우리만의 공간을 위해 떠난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지영씨를 오빠라고 불려서인지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지영씨도 나를 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다.
창밖의 풍경은 날씨가 좋은 탓인지 맑고 아름다웠다. 오빠의 얼굴도 오늘따라 차창 밖의 풍경처럼 유난히 밝아 보였다. 나는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자서 왠지 졸렸다. 왜냐하면, 짐도 꾸리고 마음이 들뜨고 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내 고개가 오빠에게로 향했다. 오빠는 나를 편안하게 팔을 뻗어 감싸주었다. 오빠에게 기댄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고 나니까 청주에 거의 와 있었다.
청주에서 우리 일행은 화양동 가는 버스를 탔다. 화양동까지는 1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했다. 그전에는 차가 끝까지 안 들어가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지금은 버스가 종점까지 가기 때문에 무척 편했다.
종점에 다다르자 우리는 짐을 꾸려 버스에서 내려 야영장으로 향했다. 큰 바위가 여기저기 자연의 경관을 이루어 계곡의 경치를 한층 더했다. 그 큰 바위 사이로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점점 우리 귀에 가까이 들려왔다. 우리는 얼른 달려가 물에 손을 담겼다. 너무 차가웠다. 그리고 손으로 한 폭의 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서 혀로 음미했다. 유리같이 투명하고 깨끗한 물이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 위에 한줄기 소나기처럼 나의 갈증을 말끔히 없애주었다. 너무나 시원했다. 집에서 먹는 그 물과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물이었다.
아직 여름이 일러서인지 피서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텐트를 치려고 마땅한 자리를 싶게 찾았다.
남자들은 텐트를 치는 동안 우리 여자들은 벌써 점심때가 되어서 가져온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점심을 준비했다.
집에서 편하게 자란 나는 밥을 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인지 우습지도 않은 사건이 그만 일어났다.
나는 밥을 하고 같이 온 여자는 찌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텐트를 치고 있던 오빠가 나에게 여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에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했다.

“어, 이거 무슨 냄새야? 밥 타는 냄새 아냐?”

나는 얼른 불을 줄이고 냄비의 뚜껑을 열어 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밑에는 탔고 위에는 아직 생쌀이었다. 다름 아닌 삼층밥이 된 것이었다. 나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오빠보고 태연한 척 말을 했다.

“오빠? 누룽지 좋아하지?”
“나는 누룽지 좋아하는데, 친구는 별로 안 좋아할걸.”

하며 나를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오빠는 나에게 비꼬는 말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러다가는 매일 누룽지만 먹겠다.”

점심이 다 되었을 때 텐트도 다 치고 해서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식탁에서 편안하게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니 낭만이었다. 모두들 허기가 졌는지 맛있다고 한 그릇을 후딱 다 비우고 더 먹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놓였다.
우리들은 점심을 먹은 후에 여기에 온 것을 기념하려고 포도주를 따서 건배의 잔을 들었다.

“우리의 만남도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길…….”

오빠의 그런 평범한 말이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다.
나는 오후에는 오빠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껏 만끽했다. 잔잔히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오빠와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우리의 사랑이 산에 울려 퍼지라고 메아리를 보냈다.

“야……호……! 야……아……호……!”

메아리는 어느새 이산 저 산에 울려 퍼지고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야……호……! 야……아……호……!”

우린 가지고 온 카메라로 이곳을 오빠와 함께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한 폭의 사진으로 남겼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도 어느덧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드디어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이제 오늘밤만 지나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 마음이 섭섭했다. 저녁을 먹고 우리 일행은 마지막 밤을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촛불 의식을 행했다. 모두들 초를 한 자루씩 가지고 타들어가는 초를 보면서 자기 소망이 이루어지길 비는 의식이었다.
나는 촛불을 보면서 오빠랑 좋은 인연이 맺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속으로 오빠는 무엇을 빌었는지 궁금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오빠를 봤다. 오빠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이고 염불을 외는 것처럼 입을 중얼중얼 거렷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굳은 각오를 하는 듯 눈까풀이 떨리고 입술은 주문을 외는 듯 의지가 역력했다.
오빠가 눈을 뜨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뭘 빌었어?”
“혜영이 네가 빈 것 이루어지도록 빌었지.”
“오빠, 말도 안 돼.”

그렇게 오빠는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오빠가 두려워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