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수필, 글

커피숍에서 생긴 일 2

이제민 시인 2005. 4. 25. 14:49

커피숍에서 생긴 일 2

 

 

  벌써, 저녁때가 돼가고 해서 가볍게 식사나 하자고 물어보았다.
  그녀와 난 커피숍을 나왔다. 아직 어둡지 않았는데 길가에는 하나 둘 네온사인을 켜놓으며 손님 끌려고 분주했다. 낮하고는 온도가 차이가 커서 그런지 그녀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아니면 지난 일을 훌훌 털어버리려고 마음먹었는지 얼굴은 한결 밝아 보았다.
  우리는 다른 연인들처럼 걸으면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조용했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스테이크를 시켰다. 그녀는 이런 분위기에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식사가 나오자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었다.

  “천천히 드세요?”

  나는 그녀가 급하게 먹는 것을 보니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점심도 안 먹은 것 같았다. 하긴 그런 상황에서 점심 먹을 정신이 없겠지. 그녀는 어느 정도 허기를 면했는지 물을 한 모금을 마시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아, 잘 먹었다.”

  나는 반도 안 먹었는데 벌써 다 해치우고 나서 핸드백에서 꺼낸 손거울을 보며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나를 보면서 말을 했다.

  “식사를 무척 천천히 하시네요?”
  “제가 천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선영 씨가 빨리 먹는 거죠.”
  “어머! 그랬나요. 후후.”
  “점심도 안 드셨나 봐요? 하긴, 입맛도 없을 테지만요.”
  “네. 먹고 싶지 않아서 우유나 한잔 먹고 나왔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그녀의 눈은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는지 초점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니 술 한잔을 하고 싶었다.

  “와인 한잔하실래요?”
  “네. 그래요.”

  그녀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그냥 응한 듯 보였다.

  “자, 한 잔 받으세요? 마음이 울적할 때는 술 한 잔이 최고예요.”
  “네. 고마워요. 한 잔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녀도 술이 먹고 싶었는지 서슴지 않고 받았다.
  우린 그렇게 한 잔씩을 주고받으며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와인의 향긋한 맛에 그녀의 지나온 일들이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더 기다려 보세요. 그분도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올지 누가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짤막하게 말을 하고 나서 한편으론 어떻게 할지 마음이 안 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남자 얘기를 거리낌 없이 다시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담 없이 말이다.

  “그 남자는 그 여자한테 푹 빠졌나 봐요.”
  “선영 씨는 그분하고는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나요?”
  “음, 글쎄요. 남들이 질투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해야 하나요.”

  그녀는 그렇게 유머러스하게 말하고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느새 레스토랑 안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차서 빈자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주로 가족들, 연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찾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연인끼리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잠시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는지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닦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와인 한 잔을 쭉 마시더니 다시 주위를 들려보고 나서 계속 이야기를 했다.

  “지나간 그와의 일들이 다 부질없나 봐요. 잊기엔 너무 크게 내 마음에 자리 잡았나 봐요.”
그녀는 벌써 얼굴이 발개졌다. 그동안 쌓였던 얘기를 혼자 간직하기엔 벅찼나 보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가 갑자기 뒤숭숭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체하고 돌아서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를 가엾게 여겨 좀 더 들어줘야 하는 건지 오늘 친구를 만나서 가까운 유원지나 갈려고 한 것이 묘령의 여인을 만나 그녀의 슬픈 사연이나 들으니 내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야기 하자고 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했다. 그녀의 얘기만 듣고 있자니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벗어나 자연의 신비로움을 만끽하며 지금까지 그녀와 있었던 일을 잠재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니 누군가가 옆에서 잠시 있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술은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