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수필, 글

커피숍에서 생긴 일 3

이제민 시인 2005. 4. 25. 14:50

커피숍에서 생긴 일 3

 

 

  마지막 잔 건배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 그만 나갈까요?”
  “네. 좋아요.”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길거리에는 네온사인이 환히 비추고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지나가고 있었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술을 한잔한 탓인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속까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선영 씨?”
  “네?”
  “저 네온사인이 내일 밤도 오늘같이 환히 비출까요?”
  “그야, 뭐 당연하죠. 안 그래요?”
  “오늘 하루 힘든 일이 있어도 저 네온사인처럼 내일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럴까요?”
  “네. 그럼요.”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선영 씨는 어디 가고 싶은데요?”
  “음…….”
  “그럼 우리 가까운 공원이나 가죠? 여기서 얼마 안 걸려요. 천천히 걸으면서 가도 10분 정도면 될 거예요.”

  나는 그녀가 걷고 싶어 할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를 따라나섰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꽃들이 수줍게 보였다. 낮에 핀 아름다움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면 밤에 핀 꽃들은 살짝 접은 모습이 야경에 비쳐 더욱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발갛던 그녀의 얼굴은 불빛에 비쳐서 더욱더 은은하게 빛났다.
  공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공원 입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벤치에 앉아 이 싱그러운 공기를 맡으며 두 팔을 벌려 심호흡했다. 그녀도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자기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것도 모르고 우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초등학교의 아이처럼 동심에 젖은 해맑은 웃음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니 그녀가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뭔가 서로 다정한 느낌이 통하는 것 같았다.

  “어때요? 기분이 어때요?”
  “네. 아주 좋아요.”

  갑자기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며 살짝 눈을 감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좀처럼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선영 씨?”

  그녀는 잠이 들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추운지 더욱 움츠러들며 나에게로 더욱 기댔다.
  나는 겉옷을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녀는 몸을 약간 뒤척이더니 곧 편안한 모습을 되찾았다.
  새근새근 잠자는 어린아이처럼 잠들은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그녀의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향수 냄새가 내 마음을 자극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기댄 자신의 몸이 이상했는지 얼른 바로 세우면서 나를 쳐다보더니 미안해했다.

  “죄송해요. 제가 피곤했나 봐요.”

  잠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게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은 어린아이 눈동자 마냥 맑고 순수해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잠시 안절부절못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지금 몇 시쯤 됐어요?”
  “여덟 시인데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네.”
  “어쩌죠? 저 그만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집은 어디인데요?”
  “여기서 가까워요. 택시 타면 10분이면 갈 거예요.”

  그녀는 가려고 일어서려고 했다. 순간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자리에 앉게 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약간 놀란 투로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왜 이래요?”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덩달아 나도 큰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떨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자기 얘기만 다 해 놓고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가세요?”
  “무슨 얘기인데요.”

  그제야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떠올랐다. 그녀를 붙잡아 앉히기는 했는데 뭔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망설였다.

  “저기……,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왜요?”
  “선영 씨와 더 있고 싶어서 그래요.”

  나는 그냥 사실대로 얘기했다. 그녀와의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아니 같이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서 그녀의 마음을 떠봤다.

  “선영 씨는 저하고 더 있고 싶지 않으세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강력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뒤따라 일어섰다. 몇 걸음을 공원 안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도 뒤따라 걸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우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도록 아주 천천히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이 넓은 공간에 우리 둘만을 위해 가로등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내 손을 잡고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저 어때요?”

  나는 그녀에게 애교스러운 말로 물었다.

  “좋은 사람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재미없는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줘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너무 진지하게 얘기해서 막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억울하게 당한 일이라 정신이 없었나 봐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우리 다른 얘기해요?”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며 말을 계속했다.

  “오늘 밤 공기가 아주 좋죠?”

  나도 그녀처럼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별들이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저 별들을 보고 무슨 생각이 나세요?”
  “어렸을 적에 별을 보며 잠을 잘 때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 이렇게 하면서 잠든 것이 생각이 나는데요.”
  “네.”
  “무슨 생각하는데요?”

  나는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저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생각이 납니다.”
  “아. 저도 그 책 읽어 봤어요.”
  “저 외딴 별에 꽃 한 송이와 화산 세 개가 있는 어린 왕자가 살고 있었어요.”
  “그 장미의 투정 때문에 결국 자기의 별을 떠나 여러 별을 여행했고요.”
  “네. 그래요. 선영 씨도 잘 알고 있네요.”

  나는 계속 ‘어린 왕자’ 얘기를 했다.

  “그는 각각의 별에서 임금님, 허영심 많은 사람, 술꾼, 상인, 점등인, 지리학자 등을 만났지만 어린 왕자의 눈에는 다 이상하게만 느껴졌어요. 그다음별이 바로…….”

  여기까지 얘기하는데 그녀가 ‘지구이죠’라고 말을 대신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지구에서 어린 왕자가 누구를 만나서 자기 자신을 깨달았는지 알죠?”
  “네. 알아요. 여우에요. 어린 왕자가 장미가 있는 정원을 보고 자기별에 있는 꽃에 실망했어요. 그 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했고, 어떤 큰 짐승도 물리칠 수 있는 발톱(가시)을 가졌다고 했고요.”
  “그래요. 어린 왕자에게 충고해 줬어요.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얘기를 여우가 관계를 맺어준 어린 왕자를 깨닫게 했어요.”
  “어른들은 너무 단순한 것 같아요. 이런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니 말에요.”
  “그래서 그는 꽃에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고깔을 씌워주고 병풍으로 바람을 막아 준 것을 책임을 지려고 자기의 별에 되돌아가려고 일부러 뱀에게 물려 죽음으로서 돌아갔어요.”
  “그런데 말에요?”
  “뭐가요?”
  “어린 왕자가 사막에 떨어졌잖아요.”
  “네. 그래서요?”
  “만약에 말에요, 사막에 안 떨어지고 도시에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음. 글쎄요. 뭐,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겠죠.”

  그러면서 그녀는 밤하늘의 별을 다시 쳐다보았다. 아까 와는 다르게 더욱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