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발표詩】 248

거미

거미 이제민 19층 고층 아파트에 몸짓이 왜소한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실타래처럼 얽힌 미로를 만들어 놓고 먹잇감을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머리 나쁜 곤충들 위협을 느끼지 못한 채 날갯짓하기에 여념이 없다 거미의 포위망이 온몸을 누르자 그제야 눈치채는 곤충 사는 길을 외면하고 죽는 길을 스스로 택하고 마는 가엾은 곤충 뒤늦게 벗어나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보지만 몸은 더욱 굳어만 가고 그것을 지켜본 거미는 얄미운 침을 넌지시 흘려보낸다 19층 고층 아파트엔 어느새 몸짓이 뚱뚱한 거미 여러 마리가 살고 있었다. ------------------------ ·계간 『문학세상』 2005년 제2호 제2회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한밤중

한밤중 이제민 바람소리조차도 잠이든 한밤중 늘 깨여있네 조그만 방안 코끝으로 스며드는 커피향 그리움 못잊어 너에게 달려가네 너는 언제나 모든 걸 포용하는 천사 같은 마음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가깝고도 먼 그대 언제나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새벽이 되도록 그대의 꿈을 꾸네. ------------------------ ·계간 『문학세상』 2005년 제2호 제2회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수담으로 즐기는 바둑동

수담으로 즐기는 바둑동 이제민 수담(手談)으로 즐기는 하이텔 바둑동 나그네처럼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나를 정들게 하여 머물게 하고 인생의 참맛을 바둑을 통하여 알게 하는 바둑동이 여기 있으리라 바둑 한 수에 피곤도 잊은 채, 손끝에서 나오는 돌 소리에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수담 후엔 따뜻한 만남이 휴게실처럼 아늑한 우리들의 대화의 공간 여기에 낭만이 있고 기쁨이 가득한 하이텔 바둑동. ------------------------ ·통신바둑모임 『하이텔 바둑동』 회지 2호(1997년) 편집후기

들꽃

들꽃 이제민 봄바람이 불면 이름 모를 들꽃 바람 아저씨보고 인사를 해요 "안녕" 라고 바람 아저씨 "방긋" 손짓을 하며 지나가요 남들 보다 이쁘지도, 향기도 없지만 들꽃은 모나지도 않게 꼿꼿이 살아가요 저 멀리 혼자 떠다니는 구름처럼……. ------------------------ ·통신바둑모임 『하이텔 바둑동』 회지 2호(1997년) ·월간 누리 시문학 2007년 3월호

패싸움 (월간 바둑 1997년 6월호)

패싸움 이제민 상수의 말을 거의 다 잡았다고 기쁨의 탄식을 할 때 교묘히 패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 말이 다 살았다고 방심한 틈을 타 시간이 흐르면 살며시 조여 오죠 패가 나면 긴장이 고조되어 판은 어지럽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팻감들 팻감을 잘못 써 어느덧 대마는 죽고 상수의 말을 잡았을 땐 그 기쁨 누가 알랴? 패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패싸움. ------------------------ ·월간 『바둑』 1997년 6월호 「돌소리 글소리」란

귀의 마술

귀의 마술 이제민 귀에는 마술이 있어요 흑백의 싸움에 수가 적어도 잡히지 않고 몇 수 안되는 돌이 은근히 탄력이 있어요 궁도가 넓어도 죽을 수 있고 궁도가 좁아도 쉽게 안 죽는 귀 귀에는 변화가 있어요 기본 정석을 알아도 기본 사활을 알아도 싶게 적응하지 못해요 내 집같이 크지만 상수의 횡포에 빈껍데기만 남고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하수에요 귀에는 상수로 가는 지름길이 있어요 귀의 마술을 귀의 변화를 알면 실력은 소리 없이 늘어요. ------------------------ ·주간 『바둑361』 기념호(1996년 10월)

겨울 바다 · 1, 장군 멍군

겨울 바다 · 1 이제민 사랑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방황의 뒤안길 슬픈 그림자를 잊은 채 겨울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고요히 잠들 뿐 벗이 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바람이 불면 먹구름이 몰려와 성난 파도에 휩싸여 수면 위로 떠오르는 슬픈 사연들 지난 세월을 수평선 너머로 날려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현실 속의 또 다른 삶을 발견한다. ------------------------ ·1996년 8월 『하이텔바둑동』 창간호 ·월간 누리 시문학 2006년 12월호 장군 멍군 이제민 무더운 여름날 동네 어른들 느티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아침부터 장기판이 벌어졌네. 포로 진지를 정비하고 차로 정찰을 시켜 병졸이 적진을 향해 진격하네. 모시옷에 부채 들고 더위도 잊은 채 '박가야 마장..

내 마음속의 작은 병정들

내 마음속의 작은 병정들 이제민 반상 위에 두개의 작은 병정들 내 마음의 고뇌가 시작되네 손끝마다 힘이 넘쳐 사색은 시작되네 한 병정이 내 마음을 뒤흔들면 내 마음은 점점 하늘로 용솟음치네 그때마다 하나 둘 고통스런 병정들 고민과 아픔이 시작되네 머릿속엔 허전한 빈 공간뿐 아무리 찾아봐도 부족한 병정들 만회하려고 해도 때는 이미 늦어 최선을 다할 뿐…… 병정들은 가로 세로 줄지어 아름답게 서있지만 이 마음은 후회뿐 할 말은 많아도 고개만 숙일 뿐이구나. ------------------------ ·월간 『바둑세계』 1990 2월호 「독자의 난」 ·계간 『문학세상』 2005년 제2호 제2회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